그곳에 가면

도심 속 재래시장 기획 필운동 적선시장

아기 달맞이 2010. 6. 24. 01:43


 
 
효자동과 통의동, 옥인동, 필운동 등 적선시장 일대는 복잡한 서울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주변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 있다. 청와대와 가까운 지리적 이유로 개발이 제한되어 높은 건물이 없는 것은 요즘 북촌과 삼청동, 효자동 일대가 뜨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옛 정취를 즐기러 와서 새롭게 들어선 카페와 레스토랑에 가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면 적선시장에 가자. 그 크기가 매우 작은 적선시장은 작은 규모이니만큼 볼거리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선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동네시장’을 느낄 수 있다. 그 옛날 외가댁에 놀러가 뉘엿뉘엿 해 질 녘에 할머니 손 꼭 붙잡고 마실 나가던 그리운 ‘동네시장’.
 
시장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다. 적선시장이 골목마다 옛 모습을 간직한 효자동에 위치했다고 시장 초입부터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 운치 있기 바라는 것은 방문객의 이기적인 마음일 것이다. 적선시장 초입에서 과일을 파는 새파란 1톤 트럭과 프랜차이즈 가게의 모습이 외려 반갑다.

시장 입구에서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들이 점심을 먹고 삼삼오오 나오는 모습을 보니 그저 추억 순례자들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 더욱 즐거운 기분으로 입구에 들어섰다. 시장 초입에는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자신의 체구처럼 조그마한 공간에 무쇠뚜껑 하나 두고 자리 잡고 앉아 있다. 유명한 ‘원조 통인시장 기름떡볶이’와 비슷한 기름떡볶이를 몇 십 년 동안 팔아왔지만 이 할머니는 그 유명한 ‘통인시장 기름떡볶이 할머니’가 아니다. 통인시장의 기름떡볶이는 대대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은 것이 억울할 만도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것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동안 기름떡볶이를 팔아 모은 돈으로 몇 번이나 장학금을 투척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것에 관해 물어보니 부담스러우신지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적선시장의 가게들은 그 규모가 작고 물품도 소량으로 진열되어 있다. 반찬가게에는 녹두전 두 장, 멸치볶음 두 팩 등 대형마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구성만은 야무지다. 기본 반찬들과 전, 삶은 고구마, 뻥튀기에 애호박, 감자 등 채소와 달걀 그리고 버선까지. 반찬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주인아주머니가 가게 방에 앉아 휴대용 가스버너 하나 놓고 앉아 프라이팬 위에서 연신 무언가를 조용조용 만들고 있었다. 가게의 외관들은 알뜰하고 정겹다. 붓으로 직접 쓴 간판들과 주인 또는 동네 만물박사가 만들었을 나무박스가 평화롭게 놓여 있다. 적선시장 골목을 걷노라니 장보기의 즐거움이 조용하고 알뜰한, 심지어 감사한 마음까지 드는 평화에도 있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깨닫는다.
 
예전 적선시장 인근 배화여중고 학생들은 근처 남학생들에게 ‘떡볶이 냄새 난다’는 짓궂은 놀림을 받곤 했다. 그만큼 적선시장 골목에는 다양한 분식집이 쪼르르 몰려 있었는데, 밀가루떡볶이부터 국물떡볶이, 자장떡볶이까지 저마다 고유의 맛을 지니고 있던 분식집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적선시장에는 맛있는 분식집이 몇몇 남아 있는데 ‘선희네집’은 오랜 시간 근처 여학생들과 동네 주민에게 사랑받고 있는 적선시장의 대표 떡볶이집이며, ‘라면점빵’은 특유의 얼큰한 국물 맛으로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요즘 적선시장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체부동 잔치국수’는 기본을 지키는 소박한 감칠맛과 저렴한 가격, 푸근한 인심으로 인왕산 등산객부터 외부인들까지 부러 찾아오는 맛집이다. 이 밖에도 이곳 특유의 담백하고 토속적인 맛을 느낄 수 있는 백반집, 술 한 잔 걸치며 풍류를 즐기기 좋은 소규모 주점들이 모여 질박한 인생의 맛을 오래도록 이어오고 있다.
1 몇 십 년째 조용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적선시장 터줏대감 할머니의 기름떡볶이. 2 주인아저씨가 오랜 기간 고치고 닦은 손때가 배어 있는 수리점과 이웃의 술집. 3 평화로운 떡집 풍경을 보고 있자니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 괜히 서성거리며 주인장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어진다. 4 만두집에서 쓰는 가스통을 넣기 위한 나무함도 직접 만든 것. 5 평화롭고 아담한 맛이 있는 적선시장 골목. 6 골목 사이에 삐죽 보이는 ‘나나헤어샵’ 간판이 정겹다.
7 하교시간이 되면 인근 학생들로 꽉 들어차는 ‘선희네집’에서는 국물 자작한 양념이 잘 배어 있는 밀가루떡볶이를 맛볼 수 있다. 8 아담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백반집 ‘아담집’. 할머니의 손맛이 깃든 소박한 집반찬은 종류가 매일 달라진다. 그 옆은 학생들의 끼니를 간단히 해결해주고 있는 토스트점. 9 주인장이 열어 보인 뚜껑 아래에 오동통한 손만두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10,11 외부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체부동 잔치국수’집. 탁 트인 적선동과 통의동 일대를 산책하고 따스한 국물에 신 김치 말아 후루룩 넘기면 마음까지 뿌듯해진다. 매콤하고 새콤한 양념에 고소한 참기름이 딱 알맞게 조화를 이루는 비빔국수도 빼놓을 수 없다. 12 적선시장에는 술과 함께 즐기기 좋은 메뉴도 꽤 있다.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소박한 풍류를 즐기고 싶은 곳이다. 이곳에서라면 술자리 후의 씁쓸함과 허무함 대신 흐뭇한 상념을 안은 채 집으로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적선시장과 통인시장은 쉬엄쉬엄 걸어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지척에 위치해 있다. 기름떡볶이로 유명해진 통인시장은 적선시장에 비해 그 규모도 더 크고 정비사업으로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통인시장도 적선시장과 같은 특유의 소박한 운치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비단 시장뿐 아니라 적선시장과 통인시장을 잇는 골목 대부분이 그렇다. 특히 이 부근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태동지로 ‘문학 올레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곳곳마다 문인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시대에 고뇌하고 별을 보며 노래한 문인들의 작품을 떠올리며 ‘문학 올레길’ 을 순례한 후 적선시장과 통인시장을 방문한다면 더욱 애틋한 감회에 젖어들 것이다.
1 통인시장에서는 특히 반찬가게가 여럿 눈에 띄는데 모두 저마다의 색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맛깔나기로 유명하다. 전은 물론이거니와 코다리찜, 생선구이, 젓갈류, 각종 볶음요리, 건더기가 찌개만큼이나 실하게 들어간 된장국까지 다양한 반찬을 만날 수 있다. 2 통인시장에서도 대형 점포보다는 소규모 점포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자연산 두릅과 거대한 늙은 호박 두 덩이를 팔고 있는 모습. 3 불가음식을 조금 더 일반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켜 판매하는 시장 내 사찰음식 전문점. 화학조미료를사용하지 않고 과일을 이용해 단맛을 내며 검은콩견과류 된장찌개, 과일버섯전 등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색다른 메뉴를 맛볼 수 있다. 4 시장에 장난감을 판매하는 문구·완구점이 있는 모습이 신기했는데 바로 뒤편 방앗간에서 나는 고소한 참기름이 어린 시절의 감각을 상기시켰다. 어릴 때 할머니를 졸라 장난감을 고르던 완구점 또한 시장에 위치해 항상 고소한 그 방앗간 내가 났다. 콩알탄과 종이인형, 모형 자동차를 파는 시장의 조그만 완구점. 5 꽤나 오래전에 걸었을 듯한 ‘정부양곡 시범점포’라는 간판이 정겨운 쌀집.
6 보안여관 옥상에 올라가 찍은 모습. 보안여관뿐 아니라 이 일대에는 많은 문인이 기거했다. 통의동에는 이상이 살던 집터가 있는데 그 유명한 ‘오감도’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은 바로 통의동 골목이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여대생과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제주도로 사랑의 도피를 벌였다가 아내가 있는 서울로 돌아와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효자동에서 하숙하며 홀로 여대생을 그리는 시를 지었다. 7 적선시장과 통인시장 맞은편 중간쯤에 위치한 ‘보안여관’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이곳에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이던 미당 서정주가 짐을 풀고 기거하며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뜻이 맞는 청년 시인들과 함께 문학동인지 ‘시인부락’ 을 만들어 한국 현대문학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광복 이후에도 이곳은 젊은 문인과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꿈을 키우며 부당한 현실에 저항했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투숙하여 ‘청와대 기숙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설 자리가 없어지며 쇠락하던 여관은 2006년 문을 닫았지만, 그 역사적 보존가치를 지키려는 움직임으로 지금은 다양한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다. 8 일제강점기 당시 유명한 친일파가 살았었다는 알림판이 붙어 있는 적산가옥을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자료제공ㅣ에쎈
포토그래퍼 | 신지연   에디터 | 강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