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강화 나들길

아기 달맞이 2010. 6. 12. 07:23

[중앙일보 45주년 · 프로스펙스 30주년 공동기획]
둘이었다 하나가 된 섬, 둘이 걷다 하나 되는 길

초등학생들이 강화도 광성보를 지나 용두돈대로 향하고 있다. 용두돈대는 강화 53돈대의 하나로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돼 있어 해안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다.
 

강화 나들길은 『심도기행』이란 책에서 유래했다. 『심도기행』은 강화 선비 화남 고재형(1846~1916)이 섬 안의 마을 200여 곳을 둘러보고 지은 기행문집. ‘심도(沁島)’는 강화의 옛 이름이다. 1906년 어느 봄날 화남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고향인 두두미마을(강화군 두운리)을 나와 방랑을 시작했다. 화남은 섬의 크고 작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상을 7언 절구 한시 256수에 담았다. 때는 을사늑약 이듬해, 일제와 서구의 문물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격변기였다.

 


약 1세기가 흘러 2010년. 화남이 걸었던 길을 토대로 강화 나들길이 빚어졌다. 나들길은 현재 7개 코스가 있다. 이 중 가장 최근에 열린 7코스(약 17㎞)가 화남의 자취를 가장 잘 좇는다. 길은 강화궁터가 있는 읍에서 출발해 선생의 생가가 있는 두두미마을로 들어갔다가 섬 동쪽 염하(鹽河)로 빠진다. 나들길 7코스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수로와 솔나무 숲길, 고샅을 들락날락하는 기분 좋은 길이다. 산이 아니라서 발걸음이 가볍고 숲이 우거져 서늘하다. ‘화남 생가 가는 길’로 이름 붙여진 이 길은 지난달 말 단장을 마치고 올여름 첫 손님을 맞는다. 2년 전부터 이 길을 직접 “두드리며 걸었다”는 김은미(46·강화역사문화연구소)씨와 함께 나들길 7코스를 걸었다.

글= 김영주 기자
사진= 김상선 기자

# 논길을 걷다

여행객들이 갯내음을 맡으며 논두렁길을 걷고 있다.

‘봄바람 맞으며 두두미를 걷노라니, 온 마을의 산과 내가 한눈에 들어오네. 밝은 달 푸른 버들 여러 구씨 탁상에서, 잔 가득한 술맛이 힘을 내게 하구나’.

화남이 대문 밖을 나서며 노래한 첫 수다. 구씨 성을 가진 친구 집에서 약주 몇 잔을 한 뒤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거꾸로 잡았다. 강화 버스터미널 뒤편 농로로 진입해 남으로 길을 잡으면 선생의 생가가 있는 두두미마을로 향하게 된다.

논길 양 옆으로 만발한 유채꽃에 넋이 팔려 있는데 수로에서 파닥파닥 고기 떼 뛰노는 소리가 들린다. 황소개구리인가 싶었는데 잉어 십수 마리가 등지느러미를 보이고 수로 바닥을 헤치고 있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바닥의 수초를 걷어 냈더니 집 잃은 잉어 떼가 도리질을 치고 있는 것이다.

강화 섬은 고려 때 간척사업이 시작된 곳이다. 조선 중기에는 두 조각이었던 섬을 하나로 잇는 대규모 사업이 벌어졌다. 마니산 일대와 강화읍 사이에 있던 수로를 막아 둑을 쌓았다. ‘가라앉는 섬’ 심도(沈島)가 평야로 변신한 것이다.

# 불심 가득한 선원사 터

용두돈대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을 걷는 것은 강화도의 또 다른 매력이다.

콘크리트 논길을 지나 창리감리교회 오른편으로 100m. 장어구이 식당 앞에 작은 슬레이트 집이 있다. 이 집 마당을 관통해 숲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나들길이다. 마른 솔잎이 수북이 깔린 푹신한 길이다.

오솔길을 따라 한 시간쯤 걸으니 고려 2대 사찰로 알려진 선원사 터가 나온다. 오솔길은 옛 강화산성의 중성(中城) 자리. 1234년 고려는 몽골에 항전하기 위해 궁 주위로 2.7㎞ 내성을 쌓았다. 그리고 내성 주위로 다시 중성을 쌓고,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외성을 구축했다. 지금 중성의 흔적은 희미하다. 소나무 숲 옆으로 살짝 도드라진 둔덕일 뿐이다. 불상 500기를 모셨다는 선원사는 현재 터만 남아 있다.

남쪽으로 야트막한 야산을 두세 개 더 넘으니 화남 생가가 있는 두운리에 이른다. 마을과 마을은 오솔길과 고샅을 통해 끊어질 듯 이어진다. 남산뒤길·와말길·연동고개 등 옛사람이 붙였을 이름이 아직 이정표에 남아 있다.

생가는 소담한 시골집이다. 대문 앞에 누운 듯 서 있는 향나무 두 그루만이 유서 깊은 집안의 내력을 넌지시 알려 준다. 생가엔 현재 화남의 3세손 종부가 혼자 살고 있다. 종부는 아들네 집을 방문하는 날이 많아 집을 자주 비운다고 한다. 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 신미양요의 길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축조한 광성보.

두운리에서 해안 쪽으로 빠지면 우도돈대와 광성보의 중간 지점이다. 여기서 남으로 길을 잡으면 광성보·덕진진·초지진을 향한다. 7코스는 광성보에서 끝나지만 내친김에 초지진까지 가기로 했다. 2시간 정도 걸린다. 이 길은 800여 년 전 고려가 강화 동쪽에 구축한 외성을 잇는 코스다. 그리고 오늘 강화 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이 됐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상륙했다. 어재연 장군이 병사 1000여 명과 함께 맞서 싸웠다. 광성보는 높이가 5m나 되는 천혜의 요새. 그러나 신식 무기 앞에 광성보는 맥없이 무너졌다. 이날 하루 조선군 243명이 죽었다고 미 해군은 기록했다.

광성보는 강화도 국방 유적 중에서 가장 큰 면모를 자랑한다. 보를 둘러싼 성곽에 오르면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하는 염하가 내려다보인다. 덕진진과 초지진은 미국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덕진진에서 해안으로 내려오니 갯벌이다. 개펄에 사는 무수한 게가 발걸음에 놀라 움찔댔다. 자칫하면 발에 밟힐 정도다. 초지진까지 내려가는 길은 한갓지다. 갯벌과 길 사이, 농로와 황톳길은 초지대교 아래까지 이어진다.



길 정보 강화 나들길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시범 사업지 7곳 중 한 곳으로 뽑혔다. 지역 시민단체 강화 시민연대(032-933-6223)와 지방 행정기구인 강화관광개발사업소(cafe.daum.net/vita-walk, 032-930-4331)가 힘을 합해 길을 내고 관리하고 있다. 강화 나들길은 코스마다 특색이 있고 주제가 있다. 강화해협을 따라 돈대와 보·진을 잇는 2코스를 ‘호국돈대길’이라 부르고, 서해안 낙조가 좋은 4코스를 ‘해가 지는 마을’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화남 생가 가는 길’이란 이름이 붙은 7코스는 약 17㎞ 거리로 4~5시간쯤 걸린다. 시작 지점은 버스터미널과 풍물시장 뒤편 동낙천, 끝 지점은 광성보다. 숲길에 핑크 리본이 달려 있고 전봇대에 핑크색 화살표가 찍혀 있어 이정표 역할을 한다. 강화 나들길 7코스는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아 여느 길보다 호젓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