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된 안 좋은 습관인데 나는 화장실에 갈 때 마다 꼭 신문이나 책을 들고 간다. 십수년 전, 내가 화장실에 주로 들고 갔던 책은 법정스님의 저작들이었다. 무소유, 서있는 사람들... 스님의 책은 종이와 활자가 아니라 한잔의 정갈한 녹차와 같았다. 훗날 이해인 수녀님의 詩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인간의 사욕이 최대한 절제되어 피어오른 영혼의 향기라고나 할까. 스님이 어제(11일), 입적하셨다. 작년 2월,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 때도 그랬지만 마음 깊이 존경하던 동시대의 큰 스승을 떠나보내고 나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와 오랜 시간 잠자리를 뒤척여야 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단순하고 정갈한 삶을 닮을 수 있을까? 법정스님은 “인간은 복잡하고 하느님은 단순하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 기독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실천자였다.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는 우리 모두에게 스님은 삶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몸소 일깨워 주셨다. 그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스님은 그것의 실천이 가능하다는 희망의 횃불을 비추어 주셨다.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법정스님과 같은 큰 어른들과 동시대를 살면서도 어둠에 갇혀 사는 소경들이었다. 태아 때부터 유전되고 학습된 생존경쟁의 질긴 끈이 결국 우리 모두를 파괴하고 괴멸시키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무슨 몽유병 환자들처럼 신기루의 유혹을 쫒아 방황하고 있다. 진리는 그저 관념의 유희일 뿐 실제적인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악착같이 쥐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모든 걸 버리고자 하는 그분들의 삶은 외려 생경하고 어리석게 보인다. 왜일까? 개 눈에는 똥만 보이기 때문이다. ‘헷세’는 ‘데미안’에서 “껍질을 깨고 날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꿈틀거리던 고치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날듯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간이 천사보다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생노병사에 찌든 육신과 이 세상에서의 무병장수, 부귀영화가 삶의 전부라는 사악한 거짓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스님의 삶은 ‘노예해방선언’에 다름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무소유의 삶'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렸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스님은 하나님의 단순함을 많이 닮은 분들일 것이다. 두 분은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단번에 친구가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길상사에서, 법정스님은 명동성당에서 축사와 강론을 하며 영혼의 우의를 다졌다. 두 분의 우정은 불교와 기독교의 뿌리 깊은 반목에 쐐기를 박았다. 나는 과거 한 때 기독교(기독교는 크게 천주교(카톨릭)와 개신교(프로테스탄트)로 나뉜다), 그것도 개신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고 타 종교를 터부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 상대방의 종교를 비방하지 말고 존중하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에 공감한다. 그것은 내 신앙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진리는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의 수치였다.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스님은 종교의 벽을 허문 영혼의 도반(道伴)이었다. 군사독재 시절, 두 분은 민주화 운동에 뜻을 같이 한 정치적 도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땅에 친북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두 분의 정치적 견해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개혁을 가장한 친북좌파 정권의 지배세력교체(계급투쟁)에 큰 우려를 표했을 때 법정스님은 침묵을 지켰다. 소리 없는 반대였다. 그런가 하면 법정스님이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강하게 비판했을 때 이번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침묵을 지켰다. 그 역시 소리 없는 반대였을 터이다. 법정스님은 2년 전 길상사 봄 정기법회에서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운집한 신도들에게 한반도 대운하 반대서명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스님이 정기법회에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종교를 초월하여 영혼의 교유를 나누던 성인들도 정치적 견해가 갈릴 수 있다는 건 나와 같은 속물에게 색다른 흥미를 준다. 게다가 김수환 추기경님이 경상도 출신이고 법정스님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게 나의 흥미를 더욱 자극시킨다. 성인들도 지역감정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두 분의 정치적 견해가 갈린 것에 대해 실망을 느끼기 보다는 외려 위안을 받는다. 내가 두 분에게 위안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정치적 입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분들과의 우정이 손상되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만 두 분과 우리의 차이점이 있다면 두 분은 침묵으로 상대의 입장을 존중한 반면 우리는 갖은 욕설과 악다구니로 상대의 입장을 비난하고 모멸했다는 거다. 그런 차이점이 우리가 두 분에게 배울 요체다. 작년 2월,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셨을 때 법정스님은 “하느님을 말하는 이가 있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써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다.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크다”고 추모의 글을 올렸다. 스님은 기독교인인 나보다 기독교를 더 잘 아시는 것 같다. 법정스님이 어제 입적하셨을 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대신하듯 이해인 수녀님이 스님에 대한 절절한 추모의 글을 올렸다.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을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라고 스님이 떠난 허전함과 그리움을 눈물로 쏟아냈다.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엽서나 편지로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누었다. 그것은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우정과는 또 다른 우정이었을 것이다. 동성이 아니라 이성이었기 때문이다. 불순한 감정이 전혀 없더라도 이성은 묘한 설레임을 준다. 그게 없다면 기계지 인간이 아닐 것이다. 두 분이 서로의 영혼을 존경하고 사모했다면,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었을까? - 해당 글은 프런티어타임스 자유토론방 글입니다. |
베리타스 기자 [베리타스기자의 기사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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