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남편 만난 것, 삯바느질 장이가 아티스트 대접 받는 것, 아이를 못 낳은 것까지 다 나의 복(福)” 이효재 한복 디자이너
서울 삼청동에는 쇼룸도 없고 간판도 내걸지 않은 아담하고 예쁜 한옥 한복 가게가 있습니다. 자연을 닮은 한복디자이너 이효재 씨가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하는 곳이죠. 드라마 ‘왕의 여자’와 ‘영웅시대’의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던 이효재 씨…,그녀는 낮에는 혼수 한복을 짓고 밤이면 피아노 치는 남편 임동창 씨가 있는 산골 외딴집으로 퇴근을 합니다. 그리고는 살림 재미에 푹 빠져 밤 깊어 날 새는 것도 잊은 채, 바쁘게 움직입니다. 텃밭에는 고추, 부추, 연, 땅콩, 토란 등을 심고 나물 캐가며 시골 살림을 꾸려가고요. 눈에 보이는 건 뭐든 예쁘게 꾸미고 다듬습니다. 손길만 닿으면 헌것도 명품이 되는 살림 감각!입는 거, 먹는 거, 집 꾸미기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멋지게 해내는 살림꾼!
◇ 산속의 두려움 입력된 것일 뿐, 자연은 그냥 평화로운 것 ▶ 남편 임동창 씨는 너무나 잘 아는데 이효재 씨를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에요. 임동창 씨는 잘 계시나요? 충남 서천이라는 작은 도시의 중학교 음악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에요. 주위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보면 보통들은 늘 하던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늘 밖에서 같은 소리를 한 적이 없어요. (웃음)
▶ 그럼 두 분이 떨어져 계시네요? 네, 제가 빨래하러 내려가요.
▶ 늘 바람 같은 남자와 같이 사는 것이 힘들 것 같아요. (웃음) 그러다가 제가 살림의 고수라는 이야기까지 듣게 된 것이 ‘아, 세상엔 공짜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해요.
▶ 옛날에 제가 아는 임동창 씨는 혼자 사는 남자였고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이었고... 괴짜 피아니스트였고 속으로 저 남자를 누가 데려가나... (웃음) 어떤 여자와 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정말 장가를 잘 갔더군요. 남편이 음악선생님을 한다고 하니까 주변의 어르신들이 ‘네 신랑은 정말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한다’고 그러시면서 선생님처럼 막 웃으세요. (웃음)
▶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도 타고난 복인 것 같은데 이효재 씨는 늘 생머리에 생 얼굴이세요? 소위 말하는 ‘쌩얼’이신데 (웃음) 보통 자신감 가지고는 힘들잖아요. 포기한 상태죠. (웃음) 저 같은 직업은 주로 밤에 깨어서 작업을 하고 늦잠을 자고 약속시간에 부리나케 나오다 보니까 그냥 뛰어나오게 되더라고요.
▶ 집이 용인이고 일터는 삼청동인데 그 먼 거리를 출퇴근하려면 굉장히 힘들겠어요. 보통 얼마나 걸리나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다니는데 왕복 5시간 걸려요. 제가 운전을 못 하는데 버스 타면 일단은 피곤하니까 자고 지하철로 갈아타면 뜨개질을 하면서 일 구상을 해요. 저희 같은 경우는 책상에 앉아서 뭘 조립하거나 기획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며 가며 차 안에서 일을 하니까 이것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주로 한강다리를 건널 때 아이디어가 터져요. 늦은 밤 11시의 퇴근시간이 어떨 때는 비감한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성탄 같은 기분이라 ‘나는 늘 성탄이야!’ 이러면서 퇴근하고 항상 그렇게 저 혼자 놀이를 해요. 즐거워지는 놀이요. (웃음)
▶ 남편도 없는데 무섭지는 않으세요? 산속에 살면 무서움이라는 것이 스스로 입력된 무서움이더라고요. 교육받아서 생긴 무서움... 자연은 그냥 평화로운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떨쳐버리는 훈련을 했어요.어느 날 반딧불을 보고 밤하늘의 별이 쏟아졌다고 생각을 하면 예쁜데 사람이 죽어서 뼈에서 인이 나와서 반짝인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내 그림자에 내가 놀라고 내 다리에 내가 걸려서 넘어지는 거예요. 제가 치마를 입고 다니기 때문에 저는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빠져요. 그러면 서러워서 콧등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죠. 한국여자들은 강한데 내가 분연히 일어나야지... 이렇게 살면 안 돼! 그러면서 어느 날 놀이를 바꿨어요. 그러니까 생각하기 나름이더라고요.밤에 달빛이 교교한 날 흰 꽃을 보면 처음엔 소복의 여자가 나타날 것 같았는데 거꾸로 ‘서울사람 참 불쌍해 나는 이 밤에 꽃을 보네...’ 그러면서 달맞이꽃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방울 터지는 소리도 들리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하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은 잠이 안 오잖아요. 그러면 혼자 우산 쓰고 나와서 풀이라도 뽑는데 같이 사는 학생들이 소변보러 나왔다가 그림자를 보고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데 아주 질색을 해요. (웃음) 그런데 그것이 그 아이들한테는 담대함을 심어줘서 처음에는 나무그림자를 보고도 놀라다가 다음에는 ‘저거 분명히 효재 선생님이 풀 뽑고 있는 그림자일거야...’하면서 담이 세져요. 처음에는 성경책 옆에 끼고 돌아다니고 그랬는데 이제는 안 그러거든요.
◇ 이웃들로 인한 아릿함 때문에 잠 못 드는 밤 ▶ 어떤 학생들이에요? 신랑 흉보는 건데, 전국에서, 동네에서 학교에 잘 적응 못 하고 문제 있으면 어디서 들은 소리가 있어서 ‘임동창한테 보내라.’ 이런대요. (웃음)그래서 우리 집에 와보면 요즘 같이 머리 칼라로 염색 안 하던 시절에도 보라색, 은색, 흰색머리에 까까머리까지 별 아이들이 다 살았었어요. 저는 지금도 제 부족함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아이가 없어서 별을 보고 혼자 노는 것은 잘하는데 근본적으로 아이를 낳은 따뜻한 엄마하고는 다르더라고요.그래서 그 아이들을 보살필 때 요즘도 마음 한구석에 찡한 것이 내가 아이를 낳아본 엄마였다면 조금 더 따뜻하게 대했을 텐데.... 그런 반성 아닌 반성을 하고 이제 그것을 탕감 할 수 있는 것이 나이를 먹었잖아요. 그래서 이제 저도 50살이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눈이 지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좀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아이들을 대하면 좀 다르겠다 싶어요.
▶ 그 학생들과 같이 사세요? 같이 밥 해먹고 살고 그러다가 대학도 가고 각기 다른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에게 가서 전수학생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고 그래요.
▶ 임동창 씨가 없어도 덜 쓸쓸하시겠어요. 저도 늘 일이 있고 별난 남편과 어떻게 같이 사냐고들 하시는데 제가 혼수한복을 하다 보니까 아이 한둘 낳고 이혼한 집에는 혼수를 하러 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별난 신랑 잘 참아내고 이혼 안 하고 살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혼자 칭찬하고 그래요. (웃음) 친한 친구가 ‘저 여자는 참 이상한 여자다. 혼자 착하다고 그러고 혼자 칭찬하고 그런다’고 그래요. 남편도 저보고 잘살아냈다고 그러고요, 어느 날은 집에 안 들어왔는데 이웃은 ‘저 남편 또 버릇 도졌다’고 하는데 저는 굉장한 배려를 해주었다고 생각해요. 원 없이 일을 하면서 집중해보라고 시간과 자리를 내어준 것이거든요. 신랑은 저한테 미주알고주알 말하지는 않지만 저만 아는 거죠.
저는 아침잠을 자는데 아침잠을 자게 된 버릇도 신문 배달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새벽기도 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우유배달부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안심을 하고 아침잠을 자는 거예요. 그렇게 무서움을 이겨냈고 이것이 제2의 습관이 되면서 그 남은 시간을 일하는데 쓰게 됐거든요.20년 정도 옷감을 만지다 보니까 옷은 따로 그리거나 오리지 않아도 집안일이라는 것은 서서 해야 하잖아요. 퇴근해서 일어선 김에 쌀도 불려놓고 쌀 불릴 동안 밭에 나가서 연잎도 따오고 그러죠.
▶ 밤중에요? 네, 사람은 사랑하면 다 보이더라고요. 제가 심었기 때문에 어디에 무엇을 심어 놓았는지 다 알고 도라지는 이쯤에 심었고, 도라지는 기침하는 친구에게 갖다 주어야 하는데 하면서 겅중겅중 뛰어넘고 다니죠. 방수치마라 비 맞아도 툭툭 털면 되고 가시덤불도 그냥 가도 되고 보자기는 연장을 하거나 허리춤에 매거나 어깨에 두르면서 헤쳐 나가고 거의 타잔 수준이에요. (웃음) 그 즈음에 쌀이 불면 요즘은 가스레인지가 4구라 두 개는 연밥 찌고, 두 개에는 누룽지를 만들어요.아침밥에 도시락까지 싸고 외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오시면 누룽지를 선물해드리죠.외국인들이 호텔을 마다하고 한옥이라 불편할 텐데도 문화센터처럼 되어 있는 저희 가게(삼청동 한옥 효재)에서 묵으시는데 그 마음이 아름다워서 밤에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단절이 되면 쿨쿨 잠이 들 텐데 그 마음이 풀밭을 헤치고 연꽃을 따게 하죠. 그렇다고 별스럽게 얘기하면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워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말을 하거든요. 11시 정도면 공항으로 향하시는데 다들 바쁘잖아요. 그래도 저를 보려고 기다리셨으니까 차창 문만 열고 연밥을 드리면서 기내식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며 별것 아닌 것처럼 드리면 그분도 별것 아닌 것처럼 정신없이 받았다가 나중에 펴보시고는 놀라시죠.
▶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감동이겠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한 달 후면 전화가 오세요.그 밥 때문에, 머리에서는 그 밥 생각이 따라다니는데, 고국에 와서 한 달간 전시회하고 돌아가서 다시 전시회 준비하느라 바빠서 한국말을 잘 안 하다가 한 달 만에 한국말로 급하게 전화를 하시면 발음이 꼬이시는데 그 전화에 나는 또 한 달간 기뻐하고 다음에는 무엇으로 기쁘게 해드리나 그 연구를 하는 거예요.이런 인연은 한옥에 살면서 생기는 인연인데 40, 50, 60살이면 다들 추억이 재산이신 것 같아요. 식구라야 남편은 떨어져 있고 자식 교육에 신경 쓸 시간이 없는 대신 이웃들로 인한 아릿함 때문에 밤에 잠 못 들지요. (웃음)
◇ 빚 받으려다 코 껴버린 우렁각시 ▶ 도시락을 싸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도시락을 안 싸주면 밥을 안 먹어요? 친구들이 남편이 세니까 길을 잘들이래요. 결혼한 지 오래된 친구들 얘기가 코맹맹이 소리에 애교를 떨면 남편들이 말을 잘 들어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울을 보니까 제가 애교가 먹힐 얼굴도 아니고 나이도 많아서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웃음)그래서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 냉장고 안에 다 챙겨놓은 다음 점심을 잘 챙겨 드시라고 하고 나와 봤어요. 그런데 안 먹고 동네 이장님이하는 식당에 가서 그냥 사먹더라고요. 그런데 설탕처럼 퍼 넣는 것이 조미료거든요.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가 이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도시락을 싸본 적이 없고 먹은 날보다 굶은 날이 더 많아서 키가 자라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도시락만 보면 먹는다는 거예요. 밥을 먹고도 또 먹는대요.이 사람이 학생들과 모여서 과거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것이 걸린 거죠. 그래서 도시락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방법이 먹힌 거예요. 도시락을 싸서 옛날 추억이 나게 손수건에 묶어서 밥상을 차려놓고 나오니까 다 먹었더라고요. 그런데 보통은 도시락 먹고 나면 물에라도 담가놓는데 그대로 놓고 몸만 없는 거예요. 처음에는 얄밉다는 생각이 들다가 나중에는 우스워지더라고요. 얄밉다고 생각하면 계속 못 하니까 귀엽다고 생각하고 혼자 앞산을 바라보면서 귀엽다고 세 번 말했어요. (웃음)또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시락에는 계란 프라이가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 원을 한번 풀어주고 나서는 계속 싸게 되었죠.
▶ 양은도시락에 싸세요? 양은도시락은 요즘 구하기가 어렵고 보온도시락은 낭만이 없더라고요. 제가 도시락 타령을 하니까 비슷한 친구들이 꼭 있는데 도시락만 사다주는 친구가 있어요.저는 도시락 이벤트를 하고 신랑은 먹어주죠.신랑은 먹는 것에 대한 한은 풀렸다고 해요. (웃음)
▶ 아침도 꼭 정식으로 차려서 먹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요즘 세상에 못 먹었다는 한이 너무 안 된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출근할 때 꼭 아침 밥상 챙겨놓고 도시락을 싸놓는데 김치는 안 꺼내 먹으니까 얼음 가운데 김치 묻어서 해놓죠.
▶ 그러고 보니 그런 수고를 덜 하라고 집을 일부러 비워줬다는 얘기네요. 저보고 일에 집중하라고요. (웃음) 보너스라고 한다면 젊은 친구들이 저를 인터뷰한다든가 저희 집에 일을 하러 왔다가 혹시라도 아침에 쀼루퉁해서 왔다가도 제가 사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집에 가서 남편에게 해봐야지...’ 그러고 가요. (웃음)
▶ 언제 임동창 씨를 만나서 어떻게 결혼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8년째 됐는데 주위에서는 아주 연애를 진하게 했을 거라는 추측들을 하시더라고요.3만 평 되는 99칸 집에서 빈집을 지키면서 사는 아주 친한 언니가 있으세요. 언니가 매일 ‘임동창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임동창 만나라.’그랬고 그 아들이 사춘기 때 김희선이나 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임동창을 좋아해서 만날 임동창 음악을 듣는 거예요.자기 아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니까 다르게 느껴졌나 봐요. 그래서 저보고 만날 만나보라고 하는데 언니네 집이 문화재니까 한옥 공부하러 가면 꼭 30분 뒤에 임동창이 다녀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주친 적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음식을 좋아하다 보니까 도자기로 된 그릇을 찾으러 밤에 갔는데 언니가 바로 옆이니까 오라는 거예요. 그릇 찾으러 간 곳은 이천이었고 임동창 씨 집은 안성이었는데 저는 지리를 모르니까 가까운 줄 알고 간다고 했죠. 그런데 그릇을 고르다 시간이 늦어서 새벽 1시에 간 거예요. 그릇에 미친 거죠. 언니가 부르니까 미안해서 갔는데 언니는 중매 아닌 중매를 하기 위해 저를 불렀던 것 같아요. (웃음)
▶ 만나서 맘에는 드셨어요? 아니요. 처음에는 하도 희한해서 다시는 이 집에 안 오고 이 사람 안 봐야지 했어요. (웃음)저희 같은 사람은 외형적으로 어쨌든 예쁜 것을 좋아하는데 머리는 빡빡 이지, 맨발에다 입은 옷은 남루하고 터지고, 제자들이랑 오글오글 사는데, 청소는 안 해서 곰 발바닥 같은 까만 발자국이 바닥에 남아있고.... 다시는 안 와야지 했는데 그 언니가 나의 안목을 믿는다면 두 달만 만나보라고 해서 두 달을 만나보니까 여자가 가지고 있는 모성본능을 자극하더라고요. 그렇게 못 먹고 아이들하고 오글오글 살면서 오늘은 담양 가서 주먹처럼 생긴 고기 부친 것 사먹고 내일은 충주 가서 빈대떡 사먹고 제자들이랑 그렇게 사는 거예요.그리고 강의 한번해서 강의료 나오면 아이들이랑 그것으로 사는데 한번은 학생 아이가 생활비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은 거예요. 그러면서 저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죠. (웃음)그래서 저는 공연 한번 해서 이 빌린 돈 받으면 다시는 안 만나야지 했어요. (웃음) 그렇게 빌려간 돈이 정확히 말하면 그때 450만 원 이었거든요. 받고 끝내야지 한 것이 이렇게 물려 들었죠. (웃음) 살림하는 학생이 ‘효재 선생님, 우리 선생님 강의 나가시면 들어오면 드릴게요. 생활비 떨어졌거든요.’ 그러면 붙여주고...그때 한국인의 정서를 밑바탕으로 한, 곡을 쓰겠다고 공연을 안 다닌 시기였거든요.저는 빚 받으려다가.... (웃음) 만날 굶고, 아이들하고 돌아다니면서 집 밥도 안 먹고, 냄비는 너무 커서 찌개 한번 해놓으면 3일씩 먹고... 그런 것을 보면서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됐어요.
◇ 별난 신랑과 사는 것은 특별한 보너스 ▶ 그렇게 결혼을 하셨군요. (웃음) 이건 정확한 사실이거든요. (웃음)그런데 너무나 특이한 외모를 가진 두 사람이 사니까 주위에서 무슨 연애를 희한하게 했을 것이라고 상상들을 하시는데 전혀요. 우린 중매결혼이에요. (웃음)
▶ 사랑한다는 말은 하시나요? 우리 신랑 말로는 그건 아주 추접스러운 거래요. (웃음)수제천(壽齊天, 정읍)이라고 ‘달하 노피곰 도다샤~’로 시작하는 행상인의 아내가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노래한 정읍사의 곡을 쓰면서 아마 합일을 하는 것 같아요. 거기에 젖어져 사는지 요즘 우리가 말하는 ‘사랑해!’ 이런 말들은 본인 말로는 추접스럽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나는 한국말 중에 제일 추접스러운 것이 그 ‘추접스럽다는 말’이라며 지저분하다, 더럽다, 기분 나쁘다, 이런 모든 말을 포함한 것보다 더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너무 싫다고 하는데 본인은 옛날 사람들의 ‘기다림’ 이런 것에 젖어 살아서 그런지 사랑이라는 즉각 반응 같은 것이 싫은가 봐요. 예술을 하시는 분들은, 연극을 해도 그렇고 거기에 젖어 살잖아요. 그래서 그러지 않나 싶어요.
▶ 이효재 씨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해줘서 임동창 씨는 참 편할 것 같아요. 저는 제가 혼자 재미나게 노는 놀이를 하는 거예요. 이런 남편하고 사는 것을 매일 탓한들 제 표정만 나빠지죠. 평생 욕하면서 사는 이상한 할머니처럼 늙을 수는 없잖아요. (웃음) 그리고 저는 선생님을 멀리서 봤는데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 예쁘시더라고요.저희는 직업상 예쁘다는 말을 남발하지 않아요. 예쁠 때만 예쁘다고 말하거든요. 그래서 나이를 예쁘게 곱게 먹는다는 것.... 주위에 탤런트 김혜자 선생님은 눈만 봐도 거짓말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 모든 예쁜 것을 짜깁기하고 그러려면 잘살아내야지... 해요. 별난 신랑하고 사는 것을 저는 특별한 보너스라고 생각하지 ‘어우~ 내 팔자’ 이러지 않아요. 저 보러 ‘신(新)독수공방’이래요. 그래서 오늘날의 효재가 박물관처럼 예뻐졌다고 하더라고요. (웃음)저를 보러 삼청동 효재로 관광까지 온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래요.
▶ 그 집에 아무나 들어오나요? 대문은 닫아놨지만 밀고 들어오는 분들에게는 한 상을 차려드려요. 자장면이라도 한 상 차려드리고 잘해드리는데, 저는 제 모습대로 살았는데 어느 날 저를 관광을 오고 그래서 이것이 별난 신랑하고 살면서 생긴 보너스구나 싶어요. 같이 지내는 직원들에게도 저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지지 않거든요. 그냥 이렇게 겁을 주는 거예요. ‘이 우주에는 우리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초정밀 저울이 있다. 우리는 다 거기에 달리는 것 같다. 나는 살면서 더 느낀다. 그러니까 우리가 각자 다 잘살자...’저희 직원들은 저에게 뭘 보고하지 않고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살아요.
▶ 말을 너무 잘하시는데 책을 많이 읽으시나요? 요즘은 주로 만화책을 많이 읽어요. (웃음)
▶ 어릴 때부터 예쁜 것, 여성스러운 것을 좋아하셨어요? 고향이 어디세요? 충청도인데 저는 항상 제가 어땠다는 것은 모르고 살죠. 항상 이 모양이니까요. 그런데 옛날 친구들이 10년, 20년 친구들이 보면 똑같다고 해요. ‘언니는 옛날에도 예쁜 이불 좋아했다. 옛날이랑 똑같다. 봉숭아 물도 똑같고....’ 그래요.
◇ 자투리 옷으로 만든 누더기 입고 동네를 돌았던 마루타 동생 ▶ 어머니가 한복을 만드셨나요? 지금도 하세요.눈이 나빠지셔서 밤에 검은 실로 바느질은 못하시지만 TV를 보시면서 뜨개질로 모자나 목도리라도 떠서 누군가 갖다 드리세요. 별난 것은 닮은 것 같아요. (웃음)
▶ 어릴 때 다른 아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었나요? 줄넘기를 해본 적이 없고 혼자 놀면서 일하는 언니들이 귀찮았을 것 같은데 부엌에서 칼국수 만든 덩어리를 가지고 식단 짠다며 도시락 연구하고 그랬어요. 그릇 깨트려서 혼나기도 하고, 동네 처녀들에게 실 자투리 얻어다가 어른 옷은 못 뜨니까 인형모자 떴던 것이 기억나는데 어머니가 ‘너는 밤새 잠 안 자고 뭐하나 했더니 인형 빤스 떴다....’고 하시면서 혼나고 그랬어요. (웃음)그래도 방문에 담요치고 촛불 켜놓고 몰래 하면서 엄마를 이겨 먹었던 딸이었대요. 그러면 엄마가 ‘너는 나중에 커서 신랑 등골 빼먹겠다.’고 하세요. 저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싶은 것이 사실 저희 일이 나쁘게 말하면 사치를 조장하는 일이거든요. 제가 출근을 할 때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몸 아프신 분들이 음악 들려주면서 지나다니면 돈을 드리고 고개를 돌려요. 30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 내려서 효재에 도착할 때까지 그 영상이 따라다녀요. 그러면 제가 생각해요. ‘아 내가 이 기분이 지속된다면 나도 테레사 수녀처럼 살 수 있겠구나...’ 그런데 우리는 한나절이면 잊어버리거든요. ‘좋은 세상을 만나서 좋은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신랑 등골 빼먹는 것이 내 직업으로 꽃을 피워서 다행이었다, 그것도 복이구나....’이런 생각을 해요.
▶ 동생에게 늘 뭔가를 해 입히셨다고 들었어요. 여동생은 제 마루타였죠. 사이즈가 작으니까 인형 아니면 동생이 제 마루타였는데 동생은 아직도 절 싫어해요. 극성맞은 언니 때문에 자기의 어린 시절은 마루타였다고요. (웃음)
▶ 주로 어떤 옷을 해 입혔어요? 남학생들이 입는 교련복을 맞춰서 생년월일을 붙여주고 안 입으려고 하면 백 원을 줘서 동네 한 바퀴를 돌게 하고 그랬어요.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자투리 옷 조각을 입히고 동네에 내보내면 아이들이 거지라고 놀리는 거예요. 안 가야 하는데 백 원을 주니까 나갔죠. 나중에 커서 생각하니까 100원에 영혼을 팔렸다고 분하다고 그래요. (웃음)
▶ 그 동생은 지금 어떤 일을 하나요? 한학자예요.
▶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아버님도 한학자셨는데 돌아가셨죠.
◇ 나에 대한 내 대접은 내가 먼저 대접하는 것 ▶ 아버님이 예뻐하셨어요? 유일하게 저의 남다름을 칭찬했던 분이셨어요. 그 기운으로 제 친구 아이들이 별나서 고민할 경우 전지훈련처럼 저희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칭찬도 하고 만화책도 사다주면서 친구처럼 잘 지내요.그러면 친구들이 ‘너한테만 갔다 오면 얘들이 기가 살아서 엄마를 이겨 먹으려고 한다.’면서 황당해 해요.
▶ 바느질하는 것에 대해 어머니가 안도와 주셨을 것 같아요. 당신 닮은 것이 싫었을 것인데 요즘은 좋아하세요. 가만히 분석을 해보니 옛날에는 남편이 집을 나가면 여자들이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바느질이었거든요. 그리고 그 당시 최고의 복은 남편 돈으로 사는 것이었어요. 그러다 세상이 바뀌면서 능동적인 여성들은 직장생활을 하게 되고 금방 재혼이라도 해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김옥길 총장님 같은 경우에 어머님이 바느질을 하셨다고 하거든요. 우리 윗대 어른들께서는 어머님들이 집안에서 아이들 교육을 시키고 다 바느질을 하셨죠. 그런데 저희 때만 해도 여자들이 나가서 일을 하고 자기 삶을 개척해서 재혼을 하면서 자기 삶은 행복해지는데 아이들은 외롭고 쓸쓸하게 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바느질을 하던 엄마의 자기 삶을 접은 그 희생에 따라서 아이들이 성공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한번은 감동적인 일이 우리나라의 1대, 서릿발 같은 기자 분이었던 할아버님이 저에게 비웃으시면서 ‘요새는 옷 하는 사람도 아티스트라며?’하세요. 그런데 저는 너무나 할아버지가 맘에 드는 거예요. 어른한테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되지만 귀여워서 ‘네, 좋은 세상 만났죠. 삯바느질 장이가 요즘 아티스트라네요.’ 이러면서 친해진 경우가 있어요. (웃음)
▶ 고생했던 적도 많았을 것 같아요. 저는 누가 시킨다고 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제가 못 참아서 하죠. 밤 2시에 풀밭에 나가서 헤치는 것, 아침잠 자는 것... 다 제가 못 참아서 하는 거예요. 별남 남편 만난 것, 삯바느질 장이가 아티스트 대접을 받는 것, 아이를 못 낳은 것까지 저는 제 복이라고 생각해요. 객관적으로 살 수 있고, 나는 남은 생을 좀 더 객관적으로 살다 가야겠구나 생각해서 사실 아이를 못 낳은 사람은 정신연령이 18살이어서 결벽증이 심해요. 그래서 전에는 공중화장실에 가면 내 손만 씻고 물이 나한테 튈까 봐 조심스럽게 나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나이를 먹었다고 휴지 막 버린 것 꾹 눌러놓고 주변에 물이 튄 것까지 다 닦고 다음 사람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 별난 18세에서 벗어나 극복하고 있구나 싶어서 또 혼자 칭찬해요. (웃음)
▶ 효재 씨의 삶과 일상은 거의 남을 위해서 사는 것 같아요. 본인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세요? 저는 그것이 기쁘고, 어떤 분이 ‘여기 오면 대접받는 느낌이 든다.’고 그러셔서 ‘그것은 나에 대한 대접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나한테 잘해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제일 편한 방법은 내가 먼저 대접하니까 그 사람이 나를 존중하더라, 그래서 그것은 나에 대한 내 대접이다.’ 라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어느 날 성경을 보는데 베드로가 성문 밖에서 우는 장면이 가슴에 맺혀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그 말이 너무 와 닿아서 성벽을 잡고 운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저에게 기적이 일어났어요. ‘아, 나는 면벽 수행하지 않겠다. 노동을 하겠다...’ 그리고 나와서 명상이라는 것이 방법이 다 다르니까 풀을 심고 늘 일을 하니까 오히려 집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면벽 수행을 한다고 하니 오만 잡념들 때문에 시간만 아깝고 졸리고 그러고 나면 후회만 남았는데 풀을 심고 나면 보람차고 돌아서고 나면 정말 누군가 해준 것 같아요. 그래서 기도제목을 노동으로 바꾸고 혼자 나는 중세 수도자처럼 노동을 기도로 삼겠다고 하고 열심히 노동하죠.
▶ 낮잠은 안 주무시나요? 안자요.너무 피곤하면 버스에서 침 흘리며 잠깐 졸다가 놀래서 깨고 그래요. (웃음)
◇ 명품에 걸맞은 이효재 식 우리 문화상품 개발에 주력 ▶ 그렇게 일을 하는데도 손이 거칠지는 않은 것 같아요. 너무 거칠어서 봉숭아 물을 들이는 거예요. 봉숭아 물을 들이지 않으면 저는 노동자의 손이에요. (웃음)
▶ 돈은 좀 모으셨나요? 드라마도 하셨잖아요. 돈 되는 일은 잘 안 되라고요. (웃음) 저희 가게 효재는 홈페이지도 없고, 114에 신청도 안 해놨고, 간판도 없고, 쇼룸도 없고, 고집스럽게 일하는데 어느 날 이 시대에 맞아서 관광을 오게 되니까 이제는 굶어 죽지는 않는가보다 생각해요. 저는 천일기도가 운명을 바꿨다고 생각을 하는데 너무나 손님이 없어서 제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굶어 죽는지 아닌지 승부를 했어요. 출퇴근을 하면서 도시락 싸고 밥을 하고 남은 시간에는 손님이 없으니까 못대가리에 수놓고 마당에 풀 심으면서 그렇게 천일이 지나니까 어느 날 이 시대에 맞아서 필요해 지고 유명해 지고 여기까지 오면서 천일기도가 운명을 바꿨죠.그래서 가끔 강의하러 나가면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화살기도도 하고 일주일 기도도 하는데 천일기도는 해볼 만하다고 말해줘요.
▶ 앞으로 계획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뭐가 있으세요? 하는 일을 계속할 것 같고 이제는 아이들을 하나, 둘 낳는 세상이라 혼수를 하는 일은 드물 것 같아요. 그래서 문화상품을 많이 개발해서 명품에 걸맞은 우리 문화상품 많이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명품이라는 것이 결국 문화상품이잖아요. 우리 색깔이 있고 이 시대에 맞는 소위 퓨전이라고 하는 우리 상품을 많이 만들어서 2년 후 정도면 뉴욕에 매장도 좀 내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저희 같은 경우는 ‘해어화’라고 기생학교가 주제인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는데 스텝들과 뜻이 맞아서 문화상품을 우리식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사실 신라시절에도 왕들이 아랍에서 가져온 향을 쓰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게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가 전통이라고 말하는 거예요.그래서 우리가 이 시절 이효재가 죽고 나서 300년 뒤에 보면 그것도 그 시절에 문화였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효재의 색깔이 묻어있는 드라마를 만들자.... 해서 소품 준비하느라 또 열심히 하고 있어요.
▶ 전통을 계승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을 하고 계시는데 후대에 정말 남길만한 명품도 많이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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